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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넷] [최선 칼럼] 고베 외국인 묘지에 잠든 월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하나멜 2024. 12. 2. 22:19

“높고 외진 산기슭에 잠들다”
“140년 전 일생 헌신함에 진정한 감사를”
“우리나라 선교 현장에서도 희생한 잊을 수 없는 선교사”

19세기 중반 국제적으로 큰 변화들이 있었다. 이때의 아시아는 격변의 시간을 겪고 있었다. 자국이 생산한 제품들을 판매함과 동시에 식민지를 넓히고 무역 패권을 차지하려는 유럽 열강들의 크고 작은 다툼들이 있었다.

 

1842년 청나라가 문호를 열었다. 그리고 1854년에는 일본도 문호를 열 수 밖에 없었고 세계적인 정세에 빠르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은 외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통상 수교를 거부하였다.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서 식민지로 가는 길목에 묶여 있는 신세가 되었다.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조선에 파송한 월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선교사는 미국 코넷티것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부모에게 신앙적,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던 그는 1878년 예일대학교를 거쳐 뉴욕 의과대학교에 진학하여 1882년에 의사의 꿈을 이뤘다.

1884년 여름 무렵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를 통하여 조선 정부가 병원 설립과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 선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맥클레이가 스크랜턴 가족을 만나러 왔을 무렵에는 잘 나가는 의사로서 상위 그룹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갑자기 장티푸스에 감염되었던 스크랜턴은 질병에서 회복되자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을 하였고 1884년 10월에 조선에 파송을 받는 선교사로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2월 4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와 설득을 받아들여 1884년 11월 미국 볼티모어 메디슨 에비뉴교회에서 열렸던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스크랜턴은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과 월리엄 스크랜턴, 아내 루이자 그리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2월 3일에 조선 선교사로 출발했다.

미국 감리교는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멕클레이 선교사에게 조선을 방문하여 보라고 요청 하였고 친분이 있었던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을 알현하게 되고 고종으로부터 의료분야에 대한 활동을 허락을 받았다.

 

1885년 이들은 조선에 도착하였지만,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불안하다고 판단하여 일본 요코호마로 건너가 수신사 박영효에게 한국말을 공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 5월에 다시 조선으로 입국하여 장로교 소속인 알렌 선교사와 함께 광혜원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하였다.

 

스크랜턴은 1886년 6월 정동에 독립된 병원 건물을 마련하였다. 자신의 한국 이름 ‘시란돈’의 앞 글자를 따서 ‘시병원’이라고 하였다. 그는 1888년까지 3년 동안 약 6,867명을 진찰을 하면서 의료선교에 힘썼다. 또한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 ‘보구여관’을 설치하였다.

 

그 후 ‘보구여관’은 여의사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크랜턴은 한글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 큰 공헌을 하였고 서울 시병원,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수원 종로교회, 여주 중앙교회를 세웠다.

 

그는 의주, 평양, 원산, 대구, 전주, 공주 등에 산재해 있는 감리교 선교 사업을 총괄하면서 교회, 정동의 시병원, 상동 진료소, 정동 보구여관 사역을 하였고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교육까지 감독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물론 성경번역과 1889년에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스크랜턴은 1907년 선교정책 방법론을 놓고 직속상관인 해리스 감독과의 갈등과 불화로 선교사직과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오직 의사로만 활동을 하였다. 그 후 15년의 삶은 파란만장한 고뇌와 싸움의 연속이었다. 월리엄은 1909년 어머니의 장례 후에도 요양소와 병원사업을 하면서 조선에 남기를 원했지만 그마저도 사업이 수월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1917년 일본 고베로 갔다. 모든 것을 잃고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고베에 있는 외국인촌 야마모토도리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미국 영사관 고문의사로 일하면서 외국인 국제병원 의사로 봉사 하였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투병 중에 폐렴으로 1922년 3월에 소천 하였다.

 

서양과의 교역을 위해 1868년 개항되었던 고베 항은 단시간에 물류 운송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외국인들의 발길을 사로잡았고 서양 문화, 음식, 의복, 건축이 들어온 일본 최초의 지역 중 한 곳이 되었다.

 

일본 고베는 외국인을 위한 공동묘지 두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지방 정부에서 모든 외국인 무덤을 롯코산 후타타비 공원에 자리한 삼림 지대에 조성하였고 1962년 새로운 공동묘지로 이장을 완료하였다. 롯코 산맥은 고베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필자가 일본선교사대회를 참석하면서 일본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월리엄 스크랜턴이 잠들어 있는 고베 외국인묘지를 찾아보았다. 일본 롯코산(해발 931M) 국립공원을 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에 파송된 최초 감리교 선교사인 월리엄 스크랜턴은 우리나라 선교의 현장에서 교육, 의료, 교회, 번역 등의 많은 사역을 하였던 선교사이다.

 

조선인을 향한 그의 헌신과 업적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높고 외진 산기슭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우리나라 양화진 선교사 묘역은 서울에 있어 접근성이 좋은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심금을 울렸다. 140년 전에 이 땅에서 헌신 하셨던 그 분의 일생에 진정한 감사를 드린다.

▲최선 박사, 삼백만운동본부 상임대표/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한국교회공보 논설위원/FEBC서울극동방송 칼럼니스트/OCU대학교 겸임교수/GOODTV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한국작가회의/샬롬의 나비효과 외 34권/시인/작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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