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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넷] [최선 칼럼] 스위스 개혁파의 교훈

하나멜 2024. 9. 28. 13:06

“종교개혁자들의 진정한 의미를 본받아 삶의 자리에서 열매를 맺자”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심각한 영적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분명한 목소리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계기가 되자”

 

로마가톨릭의 반성경적인 교황중심이 최고조를 이루었던 당시 유럽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금도를 벗어나 타락의 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시점에 스위스 출신의 종교개혁자가 태어나게 된다. 그가 바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이다. 그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동시대 사람으로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위대한 개혁자이다.

 

금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도전을 받고 있으며 영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중시했던 전통의 가치들이 폄하되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제정 준비로 인한 역차별을 받아 교회와 신앙의 기둥들이 심각하게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안타까운 시점에 우리는 종교개혁의 달을 맞이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츠빙글리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종교개혁자들의 진정한 의미를 본받아 이 시대에 필요한 가치와 바른 교훈을 삼아 삶의 자리에서 열매를 맺고자 한다.

 

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 자치주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출생한 츠빙글리는 1498년 비엔나로 유학하면서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그는 1502년 스위스 바젤에서 당시 최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심취하여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1506년 사재 콘스탄스 서품을 받았으나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가 교회에 관한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부정과 부패의 부당함을 체험하였다.

 

급기야는 아인지이델른 수도원에서 가톨릭 공로사상 선행에 의한 구원교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그가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에 입각한 사역을 하기로 다짐하게 된다. 그리하여 151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목회를 하며 성도들에게 로마가톨릭에 대하여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선포하였다. 츠빙글리가 가는 곳곳마다 개혁의 물결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531년 10월 갑펠에서 있었던 가톨릭 연맹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장열하게 전사하게 된다.

 

츠빙글리가 스위스 취리히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무엇보다 교회개혁을 위한 공개토론을 강조하였다.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자리를 만들어서 진정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마틴 루터가 개인적 번민과 복음적 진리에 대한 고뇌의 결과로 깨달음을 주었다고 한다면, 츠빙글리는 현실 교회상에 대한 반성으로 깨달음이 주어진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1519년에서 1556년에 이르기까지 신약강해를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신앙적인 오류와 종교적 남용을 심도 있게 비판 하였다. 또한 츠빙글리는 1521년 로마 교황의 용병요구에 거부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였으며 용병 파병 반대 운동에 누구보다도 강력히 실천에 옮겼다. 1522년 4월에 이르러 사순절 날 고기금지에 대한 비난의 수의를 높이게 된다. 외형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에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아울러 그는 소시지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사순절 첫날에 그와 동료들이 소시지를 먹었는데 사순절 기간에 육식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면서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1523년 1월에 제1차 공개 토론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67개 신조” 발표를 하였다. 츠빙글리는 성직자 결혼금지 제도를 어기고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하였다.

 

1차 토론이 1523년 1월 29일에 있었다. 67개조 논재 중에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비슷하였다. 격렬하게 안건을 걸고 토론하였고 시의회에서 통과 되었다. 예배 의식의 근본적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교회 정치의 주권은 교회에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한 것이다. 1523년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있었던 2차 토론은 성상을 더 이상 교회 안으로 가져오지 않으며 이미 있는 성상만 일부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3차 토론은 1524년 1월 19일에서 20일까지 있었다. 미사는 인정되나 성상을 폐지하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재세례파와 결별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4월 16일이 개혁교회 최초 복음적 성찬예식을 거행하게 되는 역사적인 날로 기록에 남아 있다.

 

구체적인 교회의 갱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사의 폐지를 단행해야 한다. 성경에 입각한 설교를 해야 한다. 성상의 금지를 선포한다. 규칙적인 빈민구제를 실시한다. 윤락 매춘을 폐지한다. 그리고 사역자들을 배출할 신학교 설립을 한다.

 

1529년에 있었던 가톨릭 제후들의 기독교연합과 복음적인 스위스 사이의 무장투쟁은 치열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제1·2차의 카펠 전쟁과 스위스의 종파분열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1531년 로마 가톨릭 교도와의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싸우다가 47세의 나이로 종군목사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스위스 취리히 개혁운동은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로 전수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의 태동은 『제1 헬베틱 신앙고백서』 그리고 취리히 합의서 작성에 있다. 그 합의서에 서명한 개신교인들을 역사적으로 개혁파라고 부른다.

 

스위스 개혁파의 주요 업적과 신학은 츠빙글리와 개혁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1529년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열린 성찬논쟁에서 결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는 성찬의 제정어인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루터는 문자 그대로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며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피가 실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각기 자신들의 개혁의 길을 가게 되었고 결국 회담은 결렬로 이어졌다.

 

루터파는 공재설, 가톨릭교회의 예전 일부 유지, 강단의 십자가, 촛불, 제등을 앞세우는 의식을 표명했던 반면에 츠빙글리 개혁파는 기념설, 가톨릭교회의 모든 잔재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하고 강단과 강단 밑의 성찬석 이외의 모든 장식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츠빙글리의 개혁 원리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를 확고히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저서로는 "음식의 선택과 자유"(1522), "결론의 해석과 근거들", "참 종교와 거짓종교에 대한 해설"(1525) 등이 있다.

 

종교개혁의 달을 맞아 역사적인 스위스 개혁파의 발생과 그들이 주장했던 핵심들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반기독교적인 환경이 조성되는 상황에서는 영원한 진리가 되는 성경, 구원의 핵심인 믿음, 우리가 땅 끝까지 증거 해야 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한다.

 

우리는 부흥의 시대를 지나 마이너스 성장으로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교회와 우리의 생활에서 영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도전을 받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교회 연합예배와 찬양 그리고 큰 기도회에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기간 동안에 어느 기관들보다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한국교회만 몰아부처 성도들을 이탈하게 하였고 작은 교회들이 사라진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월 27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진행하는 광화문, 시청, 서울역에 참석을 하여 기독교의 분명한 목소리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50년 만에 200만이라는 기독교인 대규모 집회가 있을 예정이다. 나하나 쯤이야 하는 안일한 인식을 버리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개혁파의 후손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든든하게 세우는 연합예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심각한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를 바르게 선도하고 세워가는 국내외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최선 박사, 삼백만운동본부 상임대표/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한국교회공보 논설위원/FEBC서울극동방송 칼럼니스트/OCU대학교 겸임교수/GOODTV칼럼니스트/한국문인협회/한국작가회의/샬롬의 나비효과 외 34권/시인/작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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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톨릭의 반성경적인 교황중심이 최고조를 이루었던 당시 유럽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금도를 벗어나 타락의 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시점에 스위스 출신의 종교개혁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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