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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경험한 인민군 무력상태

하나멜 2022. 11. 1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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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경험한 인민군 무력상태 - 뉴스앤넷

유치원 때 나의 리상(꿈)은 인민군대가 되는 것이었다. 어린이에게 비쳐진 사회 환경이란 거울의 반영이었다. 교육과 선전, 영화, 소설, 동화 등 모두 군사 문화였다. 아이들 놀이도 군사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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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때 나의 리상(꿈)은 인민군대가 되는 것이었다. 어린이에게 비쳐진 사회 환경이란 거울의 반영이었다. 교육과 선전, 영화, 소설, 동화 등 모두 군사 문화였다. 아이들 놀이도 군사놀이가 단연 최고였다. 더욱이 내가 자란 곳은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황해도 서흥군이었기에 눈에 띈 것이 인민군이었다.

1965년 8살 때 집 근처 높은 나무에 앉은 까치를 인민군 군관이 권총으로 쏘아 나에게 준 적이 있다. 그 까치를 수탉에 먹여 옆집 수탉에 지던 것을 이기게 한 기억이 생생하다. 성인이 되었을 때 권총으로 10m 과녁을 쏘았지만 맞히질 못했다. 후끈 달아 돌멩이를 던져보니 그게 맞는다. 그러고 보면 1960년대 인민군 사격술이 대단했던 것이다.

집 근처인 서흥읍 동쪽 끝에 인민군 사관학교가 있다. 이 사관학교 교관 자녀들과 학교에 함께 다녔다. 생활수준이 가장 높은 집들이 이들이었다. 1960년대 처녀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랑감이 군관이었다. 1970년대에는 대졸자, 기술자로 바뀌지 기는 했지만, 당시는 그랬다.

1968년 <푸에불로호>사건으로 전쟁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사격훈련에 나가는 군인들을 따라 마을아이들과 구경을 갔다. 당시 인민군은 사회에서 가장 잘 먹는 그룹이었다.

양 팔에 각각 10살 이상의 아이들 혁대를 쥐고 번쩍 들어올리며 힘자랑을 하였다. 사격할 때도 탄알을 아낌없이 쏘고 있었다. 단발사격이 귀 찬아 명령을 어기고 연발로 쏘면 엉덩이를 찼다. 아무튼 인민군이 전투력이 좋았을 때는 1960년대 후반이라고 미리 결론을 내린다.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과 울진, 삼척 무장부대 침투사건도 이 시기에 있을 만큼 활력이 넘치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일성이 숙청한 김창봉 대장이 민족보위상으로 있을 때이다.

한편 이 시기는 북한 역사상 가장 풍요한 때이기도 하다. 풍요했다는 것은 식량배급을 제대로 주고 또 상점에서 질 낮은 것들이라도 마음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짧은 풍요는 1960년대 후반으로서 5년 정도 지속되었다. 유일수령체계가 완성된 1970년부터 생활수준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여 1대 수령이 죽은 1994년부터는 죽음의 사신으로 나타나 수백만 목숨을 아사로 끌고 갔다.

1972년 14살 때 ‘청년근위대’ 한 달간 훈련에서 실탄사격은 6발이 전부였다. 1975-1976년기간 전문대에서 여기의 학도병 같은 대학생 교도대에서 두 달간 훈련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실탄 사격은 전혀 없었다. 내가 있었던 대학생 교도대는 북한에서 제일 큰 전력생산기지인 북창화력발전소 항공보위를 위한 37미리 고사포 부대였다.

하지만 두 달간의 훈련기간 고사포 실사격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선출된 소대만 소총을 부착한 고사포로 소총사격을 한 것이 고사포 사격훈련의 전부이다. 한번은 상공을 지나는 제트기를 향해 조준하려 했는데 고사 포신을 돌리기도 전에 지나쳐 버렸다. 수동으로 돌리는 고사포로는 안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장벽사격’ 하는 것이 ‘주체전법’이라고 하는데 소경이 막대기질하는 격이다.

1970년대 후반 북한 무력은 급격한 퇴화기에 들어섰다고 본다. 인민군이 본격적으로 사회 건설장에 동원된 것도 이 시기이다. 공병부대만이 아니라 일반 부대도 고속도로, 발전소, 공장 건설장에 대거 동원되었다. 인건비를 주지 않아도 되는 최상의 젊은 노동자 부대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1986년에는 북부철도공사장에 인민군 주력인 경보부대까지 동원된 것을 직접 보았다.

1972년 입대하였던 경보부대 출신 탈북인 윤평섭의 증언에 의하면 하계 훈련 때 15발 소총 사격해 본 것이 전부라고 기억한다. 병사들의 소총은 대부분 조성과 조문이 엉망 이어서 명중률도 낮다. 인민군 육군 중에서 가장 센 경보부대가 이 정도였다.

같은 시기 인민군 입대자인 정태성 탈북인도 기억하기를, 하계훈련 때 6발, 동기훈련 때 6발 쏘아 보았다고 한다. 1970년대에 입대하여 최전방에 근무했던 동기 동창이 제대한 뒤에 한 말이다. 남조선 군과 총격전 해보았는데 남쪽 군인들의 사격술이 더 정확함에 놀랐다고 한다.

왜 인민군에 실탄사격 훈련이 약한지 요해해 보았다. 1989년부터 군인생활을 해본 배인수 탈북자는 말한다. 자신의 부대는 전연 부대로서 1년에 30발 쏘아 본다. 탄약이 오래되면 화약성능이 낮아지기에 그런 것을 배당하여 많이 쏘아 보았다. 탄약의 성능저하는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때 증명되었다. 남한을 향해 작심하고 쏜 122미리 포탄 170발 중 절반이 섬에 미치지 못했고 그 남아 도착한 것도 25%가 불발탄이었던 것이다.

배인수 탈북인은 또다른 비사를 털어놓는다. 1970년대부터 1개 대대(약 300명)에 배당한 탄알은 500발이 전부라고 한다. 그 이유는 쿠데타 방지이다. 탄알을 충분히 가진 부대는 오직 수령 호위총국 10만 명뿐이다.

군사력에서 군민일치는 매우 중대한 요소이다. 공산당도 일찍이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군대가 인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군민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69년 11살 때 직접 본 것이다. 인민군대가 후방가족 집에 땔나무를 한가득 해 준다. 후방가족은 자식을 군대에 내보낸 집을 의미한다. 당시는 사민들이 항상 인민군과 거래에서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반전되었다. 1987년 인민군에 입대한 남동생을 황해도 서흥군에서 만난 적이 있다. 집에서 엿을 준비하여 갔는데 그 단 것을 허겁지겁 많이 먹었다. 인민군은 그만큼 굶주려 있었다. 인민군 동생은 마을에 군인이 나타나면 모두 경계를 한다는 것이다. 도둑질을 비롯해서 민폐를 너무 많이 끼치기 때문이다. 결론은 공산당의 말 대로이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된 인민군인 것이다.

1990년 8월 인민군에 간 남동생이 병사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건장하기 그지없던 남동생이었는데 어이없게도 수열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군대병원에도 약이 없다고 한다. 약이 없어도 얼음찜질만 해도 죽지 않을 병이다. 하지만 한여름 얼음을 얻을 수 없었다. 여단이란 큰 부대 내에 냉장고가 한두 대 있는데 그마저 정전이 자주 되어 가동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군대 동생 사망 전보 덕분에 항상 만원인 열차에서 비교적 좋은 군인 칸에 오를 수 있었다. 왕별 하나를 단 장령과 아래 군관과의 대화이다.

“여! 전투준비 됐어!”

“장령 동지! 병사들이 배가 불러야 하는데...”

군대 사정이 이 정도였으니 인민국의 무력도발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뉴스앤넷 #이민복 #대북풍선